22년 만에 재등장한 ‘환경비상시국’
'성장중독'에서 벗어나라는 경고

1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코 회관에서 열린 '전국환경비상시국회의'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강찬수)
‘환경비상시국’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했다. 22년 전인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환경단체들이 사용했던 표현이다. 당시 100개가 넘는 환경단체가 환경비상시국회의를 만들고 정부의 개발정책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에서도 3대 메가프로젝트와 이에 필요한 대규모 물·전력 공급계획을 놓고 시민환경단체들이 다시 환경비상시국을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명박 정부 때다. 4대강 사업 당시 환경단체들은 대규모 연대기구를 만들고 농성과 집회를 이어가며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정부와 싸웠다. 그러나 당시에는 ‘4대강 저지’나 ‘운하 백지화’가 전면에 나왔다. 하지만 ‘환경비상시국’이라는 이름으로 환경운동 전체의 위기를 선언하는 방식과는 달랐다.
왜일까.
‘환경비상시국’은 단순히 정부를 향한 경고만은 아니다. 시민사회를 향한 각성의 촉구라는 성격이 강하다. ‘지금 상황을 평상시의 정책 논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깨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다.
특히 진보정부에서 이 표현이 등장할 때 의미가 달라진다.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 시민환경단체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기업도시, 골프장, 도로, 새만금 등 개발사업이 이어지면서 실망이 커졌다. 보수정부가 환경을 파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진보·개혁정부라고 해서 개발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기 사작했다.
'환경 비상 시국'은 진보 정부가 알아서 환경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각성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환경·기후정책에 대한 기대와 협력이 상당 기간 이어졌다. 하지만 각종 정책에서 정부의 방향과 시민사회의 기대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는 평가가 축적됐다.
이런 경험은 이재명 정부를 바라보는 환경단체의 태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기다려 보자’보다 ‘처음부터 따져보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심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적 이유가 있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권도 집권하는 순간 성장과 산업경쟁력, 일자리와 지역경제를 책임져야 한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같은 첨단산업을 육성하려면 산업단지가 필요하고,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전력과 용수가 필요하다. 송전망과 취수·정수시설도 뒤따른다. 진보정부 역시 성장국가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환경운동과 진보정부 사이의 구조적인 긴장이 발생한다.
정부는 산업의 필요를 무시할 수 없다. ‘반도체와 AI를 육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전력과 물을 공급해야 한다’는 논리다. 반면 환경운동은 자연의 한계에서 출발한다. ‘강과 지하수, 토지와 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먼저 묻는다.
따라서 지금 3대 메가프로젝트를 둘러싼 논쟁도 단순한 ‘개발 반대’로 볼 일은 아니다. 산업 규모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춰 물과 전력을 공급할 것인가, 아니면 물·전력·토지·생태계의 수용능력을 먼저 확인한 뒤 가능한 산업 규모를 결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어쩌면 환경운동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얻은 교훈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정권이 바뀐다고 성장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보를 표방한다고 개발주의와 결별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환경운동이 감시해야 할 것은 정권의 색깔이 아니라 성장의 방식이다.

2004년의 환경비상시국과 2026년의 환경비상시국. 22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말이 다시 등장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이 '비상시국'의 진짜 대상은 정부가 아니라 환경단체 자신인지도 모른다.
“진보정부라는 감상에서 벗어나라. 정부가 아니라 정책을 보라. 개발의 명분이 아니라 그 개발이 자연에 요구하는 대가를 보라.”
그것이 다시 등장한 ‘환경비상시국’이 시민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일 수 있다.
22년 만에 재등장한 ‘환경비상시국’
'성장중독'에서 벗어나라는 경고
1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코 회관에서 열린 '전국환경비상시국회의'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강찬수)
‘환경비상시국’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했다. 22년 전인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환경단체들이 사용했던 표현이다. 당시 100개가 넘는 환경단체가 환경비상시국회의를 만들고 정부의 개발정책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에서도 3대 메가프로젝트와 이에 필요한 대규모 물·전력 공급계획을 놓고 시민환경단체들이 다시 환경비상시국을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명박 정부 때다. 4대강 사업 당시 환경단체들은 대규모 연대기구를 만들고 농성과 집회를 이어가며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정부와 싸웠다. 그러나 당시에는 ‘4대강 저지’나 ‘운하 백지화’가 전면에 나왔다. 하지만 ‘환경비상시국’이라는 이름으로 환경운동 전체의 위기를 선언하는 방식과는 달랐다.
왜일까.
‘환경비상시국’은 단순히 정부를 향한 경고만은 아니다. 시민사회를 향한 각성의 촉구라는 성격이 강하다. ‘지금 상황을 평상시의 정책 논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깨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다.
특히 진보정부에서 이 표현이 등장할 때 의미가 달라진다.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 시민환경단체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기업도시, 골프장, 도로, 새만금 등 개발사업이 이어지면서 실망이 커졌다. 보수정부가 환경을 파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진보·개혁정부라고 해서 개발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기 사작했다.
'환경 비상 시국'은 진보 정부가 알아서 환경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각성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환경·기후정책에 대한 기대와 협력이 상당 기간 이어졌다. 하지만 각종 정책에서 정부의 방향과 시민사회의 기대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는 평가가 축적됐다.
이런 경험은 이재명 정부를 바라보는 환경단체의 태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기다려 보자’보다 ‘처음부터 따져보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심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적 이유가 있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권도 집권하는 순간 성장과 산업경쟁력, 일자리와 지역경제를 책임져야 한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같은 첨단산업을 육성하려면 산업단지가 필요하고,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전력과 용수가 필요하다. 송전망과 취수·정수시설도 뒤따른다. 진보정부 역시 성장국가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환경운동과 진보정부 사이의 구조적인 긴장이 발생한다.
정부는 산업의 필요를 무시할 수 없다. ‘반도체와 AI를 육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전력과 물을 공급해야 한다’는 논리다. 반면 환경운동은 자연의 한계에서 출발한다. ‘강과 지하수, 토지와 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먼저 묻는다.
따라서 지금 3대 메가프로젝트를 둘러싼 논쟁도 단순한 ‘개발 반대’로 볼 일은 아니다. 산업 규모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춰 물과 전력을 공급할 것인가, 아니면 물·전력·토지·생태계의 수용능력을 먼저 확인한 뒤 가능한 산업 규모를 결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어쩌면 환경운동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얻은 교훈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정권이 바뀐다고 성장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보를 표방한다고 개발주의와 결별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환경운동이 감시해야 할 것은 정권의 색깔이 아니라 성장의 방식이다.
2004년의 환경비상시국과 2026년의 환경비상시국. 22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말이 다시 등장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이 '비상시국'의 진짜 대상은 정부가 아니라 환경단체 자신인지도 모른다.
“진보정부라는 감상에서 벗어나라. 정부가 아니라 정책을 보라. 개발의 명분이 아니라 그 개발이 자연에 요구하는 대가를 보라.”
그것이 다시 등장한 ‘환경비상시국’이 시민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