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로 가는 길

202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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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또다시 인천대교에서 차를 세워두고 사람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달만 네 번째다. 2024년 한 해 동안 자살로 세상을 등진 이는 1만4,872명,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9.1명으로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4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일터에서는 매년 수백 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신생아 수는 급감해 합계출산율이 0.7명대까지 추락했다. 자살·산재·저출생이라는 삼중고는 대한민국 사회의 ‘생명 경시’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왜 한국에서만 이런 현상이 유독 심각하게 나타날까. 높은 인구밀도와 자원 부족, 과도한 경쟁 구조가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빨리빨리’ 문화와 압축 성장의 과정에서 성과와 속도가 사람보다 앞섰고, 효율이 안전을 밀어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경제적 지표가 올라가도 삶이 더 힘들어졌다고 느낀다.

산업재해 문제는 그 대표적 사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산재 사망률 최악 수준이라는 불명예는, 안전보다 비용 절감을 우선한 기업 문화와 관리 감독의 허술함이 만든 비극이다. 또 저출생 위기는 국가 존립 자체를 흔들고 있다. 출산율이 0.7명대로 고착화된다면, 한국은 세계 최초로 인구가 자연 소멸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된다.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청년은 줄어드는데, 노년 인구만 늘어나는 사회에서 경제·사회 시스템이 지속 가능할 리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단순히 ‘개인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사회 전체가 생명을 존중하는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첫째, 위기 상황에서 SOS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 지금은 자살을 고민하는 이가 극한으로 몰려야만 상담이나 지원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위기는 순식간에 찾아오고, 그 순간 주변과 연결되지 못하면 비극으로 이어진다. 스마트폰, 온라인 플랫폼, 지역 사회망을 활용해 간단한 ‘위기 알림’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 신호를 받으면 전문 상담 인력과 지역 사회가 곧바로 연결되어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위기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사건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둘째, 온 사회가 함께 아이를 기르는 시스템이 절실하다. 저출생은 단순히 젊은 세대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 교육 경쟁, 돌봄 공백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이제는 가족에게만 육아 책임을 전가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한다. 공공 보육 시설의 확충, 지역 돌봄 공동체, 직장에서의 유연 근무와 육아휴직 실질 보장 등이 필수적이다. 나아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국가와 사회가 함께 지는 책임”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셋째, 일터에서 생명을 지키는 안전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산재 사망은 ‘운’이나 ‘개인 부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안전 설비 투자와 관리 감독을 기업의 비용이 아닌 ‘생명권 보장’으로 인식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ESG) 평가에도 산재 사망 건수와 안전 관리 지표를 강력히 반영해, 안전을 외면하는 기업이 시장에서 불이익을 받도록 해야 한다.

넷째, 취약계층·미래세대·다른 생명종을 함께 배려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장애인·노인·이주노동자 같은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불평등 구조 속에서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을 먼저 살피는 것이 생명 존중의 출발이다. 동시에 미래세대가 살아갈 터전을 지금 우리가 잠식하지 않도록 환경을 지키고 기후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종도 존중하는 생태적 시각이 필요하다. 생명은 인간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삶이 가능해진다.

다섯째, 절제와 나눔의 사회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무한 경쟁과 과소비가 아닌, 덜 가지더라도 이웃과 나누고 미래세대와 자연을 위해 남겨두는 삶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나와 내 가족만 챙기는 울타리로는 사회 전체가 버텨낼 수 없다. 작은 몫을 나누어 이웃과 약자를 돌보는 문화가 정착할 때, 한국 사회는 비로소 지속 가능한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자살률 세계 1위, 산재 사망률 OECD 1위, 세계 최저 출산율이라는 세 가지 경고음은 모두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금처럼은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삶이 버겁다는 이유로 다리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가 늘어나는 사회, 아이 울음소리가 끊기는 사회, 자연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사회는 결국 우리 모두의 얼굴이다. 이제는 사람을 최우선에 두는 사회, 누구나 위기 때 SOS를 보낼 수 있고 그 신호가 반드시 응답되는 사회, 아이를 온 마을이 함께 키우는 사회, 취약한 이웃과 미래세대와 다른 생물종까지 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자살·산재·저출생이라는 삼중고를 넘어설 유일한 길이자, 우리가 미래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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